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2015.12.08 ~ 2015.12.30
김기태

■ 전시 개요

• 전시명 :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 개관 2주년 기념 초대전
           김기태 개인전,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전시기간 : 2015년 12월 8일 (화) ~ 12월 30일(수)
• 전시오프닝 : 12월 8일(화) 6~8pm
• 전시장소 :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
• 관람시간 : 월~토 11:00~19:00 | 공휴일 휴관
• 작가와의 만남 : 2015년 12월 18일 (금) 5~6:30pm | SPACE22 세미나룸
• 전시후원 : 미진프라자  

■ 전시 기획의도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의 개관 2주년 기념 초대전으로, 김기태의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를 기획합니다. 지난 2년간 SPACE22는 작업력이 15년 이상이 된 중진․중견작가들의 전시와 공간지원을 해왔고, 그동안 ‘이원철, 박홍순, 김창겸, 안옥현, 이규철, 차경희, 이민호, 황인화, 이재용, 임재천, 김민호, 지성배, 이영욱, 주도양, 미연, 이한구’작가가 선정되어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오는 12월 8일에는 공간지원 뿐만 아니라, 특별히 도록제작을 지원하는 개관 2주년 기념전시를 선보입니다. 2015년, 개관 2주년 기념전시의 주인공은 김기태 작가입니다. 김기태 작가는 중앙대학교에서 사진학을 전공한 후, 사진가이자 사진교육자로 뚜렷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번 전시,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展은 김기태 작가의 미발표 신작 40여 점으로 구성됩니다. 작가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미지의 세계를 특유의 견고한 감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와 사진을 향한 존재론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김기태 작가의 전시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전시 서문

끝낼 수 없는 사진

글 : 최연하(전시기획자, 사진비평가)

김기태는 지극히 사진적인 경로를 밟아온 작가이다. 사진학을 전공하고, 20대 후반부터 주요한 기획‧그룹전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사진의 의미망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기술과, 사진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치밀한 작가로 꼽혔다. 그런 그가 <마음속의 표적> 이후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미학적인 이상과 멋진 작품의 생산에 대한 답이 아니라, 오직 사진찍기 안에서, 사진을 통해서, 사진만을 향한 고독한 그의 행보가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展에서 결코 끝낼 수 없는 사진의 형태를 보여주게 되었다. 김기태에게 사진찍기는, 사진 자체에 대한 탐색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의심해보는 일이었기에 장르적 구분에 기초하지 않는 사유의 흔적이 그의 사진을 이루었고, 사진의 본질적인 고독과 유랑 속에서 기존과 기성을 전복하는 그만의 고유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전시를 기다려온 이들이 ‘중단 없는 그의 시작’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새로운 사진의 역량, 즉 말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것들,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의 개별적 가치를 결국 사진으로 표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명료한 인식이 아니라, 끝없는 바스락거림과 중얼거림 속에서 반복되는 자율적인 사진이 김기태의 신작,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이다.

모든 사진은 침묵의 바위이자, 바람의 중얼거림이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말을 떠올리기도 하고, 침묵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사진은 세계의 축소이자, 편린이기에 많은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해독할 수 없는 바람의 언어로 스칠 뿐이다. 김기태의 사진은 의미를 지연시키며 오직 바라보기의 권리만을 허용한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사진 앞에서 물러나게 되고,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바라보게만 한다.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의 주요한 시간과 공간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뭇 다른 장소’를 개시하며,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사는 붉은 마음’이 언뜻 잡히는 일상 속에서 형성되어 있다. 일상이 오직 일상적인 것들로 이뤄진 시공이듯이, 사진의 공간은 사진찍기에 의해서 비로소 열리는 공간이다. 사진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조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온 김기태는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에서 기존의 가치와 기성 세계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을 사진의 형성조건으로 배치했다. 그의 초기 사진이 의미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데 치중했다면, 근작은 반대로, 의미로부터 이탈하면서 사진가/주체의 자리를 약화시키며 찍는다는 행위의 사유의 탐색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결정에서 벗어나, 끝없는 중얼거림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진은, 의식에 의해 포착될 수 없는 가볍고 헐거운, ‘익명의 있음’만을 제시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역으로 드러나는 텅 빈 충만함,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과 한낮의 무료한 긴장 등 상반되는 것들을 결합하고 대립시키거나 분산, 헤맴을 통해 의미의 바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이처럼 단일성과 담론을 회피하며 재현이나 상징의 그물망으로 포섭될 수 없는 비변증법적인 형태로,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동일한 의미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미처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자가 세계의 재현에 그친다면, 후자는 지식과 담론의 영역으로 수렴될 수 없는 진정한 사유의 자장이고, 그러므로 전자보다 그 힘은 배가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영역, 즉 의미의 바깥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편하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기에 위험하기도 하다. 또한 언제나 자기를 벗어나면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상징적인 코드가 쉽게 형성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진들은 체계와 진리를 위한 수단이기보다, 그 자체가 지향점이기에, 찍는 사람과 보는 사람에게 모두 어려움과 질문을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사진의 힘을 솟아오르게 하는 이러한 의미의 미끄러짐은 찍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게 해주고, 길항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작품의 구현에 동참하게 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요컨대 좋은 사진이란, 의미의 중심을 향한 동일시보다 난해와 (약간의) 고통의 체험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이한 모순이야말로 사진의 본질이 아닐지, 의미의 무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직 지속적인 사진찍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역설을 김기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김기태의 사진이 전하는 웅얼거리는 움직임은 사진의 언어자체라 할만하다. 그것은 이미지의 세계에 매혹된 자의 욕망의 의태어이기도 하다. ‘무작정 시내버스에 올라 창밖의 풍경을 보며 종점에서 종점으로 배회하기’, ‘어두운 영화관에 무심히 길게 앉아 있기’, ‘오래되고 신비로운 물건들을 수집하기’가 취미인 김기태에게서 불확실하지만 절대적인 매혹의 시선들을 보게 된다. 의미의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는 불연속적인 선과, 견고하지만 부드러운 모서리의 사물들, 삐딱하면서도 완곡하게 서 있는 나무와 꽉 차 있지만 성긴 화면, 선명한 그림자와 화사한 테이블, 부드러운 틈과 위태로운 가벽, 높은 채도의 주름진 빨강과 팽팽하면서 구멍이 난 포장지, 극도로 불확실한 지점 등 김기태의 사진에서 의미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무기력한 것들을 힘으로 전환시켜 밀도 높은 고요를 이루고 있는 것이 김기태의 사진이다. 무한한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찰나의 이미지와 같은 것, 혹은 자유로운 공간속의 흔들리는 통일성과 거듭되는 우연들. 이해를 벗어나 있고 해석될 수 없는 열린 이미지이자, 닫힌 프레임이 바로 김기태의 사진임을 알게 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미지가 반복되며, 침묵만이 생성되고 있는 결코 ‘끝낼 수 없는 사진’인 것이다. 이 조용한 반란과 교란, 지속되는 부재는 결국 사진/가의 자리가 아닐지, 김기태의 사진을 마주하며 생각하게 된다.


■어느 회의주의자의 카메라    

김기태의 사진들은 읽기가 힘들다. 그 독해의 어려움은 그의 사진들이 복잡한 의미 구조를 포함하거나 숨기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어려움은 오히려 그의 사진들이 아무런 의도적 구성도, 아무런 의미의 코드도 안에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진들이 속 깊은 의미를 구성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한 작가의 사진들 안에 의미의 코드들이 없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 코드의 부재는 아마추어처럼 무작위적인 이미지들로 프레임 공간을 채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프로처럼 일부러 의미구조를 해체 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태의 사진들은 두 경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모종의 환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세상이 사물들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들에게 별 관심도 없고 신뢰도 보내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다만 사물들 자체에게 주목할 뿐, 그것들을 의도적 기호로 재구성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들 안에서 어떤 잉여의 성격, 굳이 작업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듯한 무의도성이 발견되는 것도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때로 그의 눈 안으로 뛰어드는 사물과 공간들에게 렌즈를 겨냥하고 그들의 순간 이미지들을 프레임 안에 저장할 뿐이다. 사물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원칙적으로 무관심의 태도, 환멸의 태도다.

그렇다면 그의 사진들 안에는 정말 아무런 코드도 없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굳이 칸트의 정언을 빌리자면 그의 사진들 안에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종의 코드가 있다. 분명 그렇게 의도되지 않았음에도, 꼼꼼하게 분류해 보면, 그의 사진들 안에는 일련의 논리적 프로세스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공간-무너짐-폐허-문양-생성의 프로세스다. 그의 프레임 안에는 우선 그것이 방이든 건물의 내부이든 평범한 일상의 공간들이 담겨있다. 이때 이 공간은 공간 자체, 시간이 부재하는 공간들이다. 그러나 시간 없는 공간이 존재할 수 없듯 그 공간들에게 시간이 부여된다. 시간과 더불어 공간들은 곰팡이가 앉거나 벽지들이 일어나면서 조금씩 무너져 간다. 무너진 공간들은 삼차원이 아니라 이차원 프레임 공간으로 이동해서 캔버스 같은 평면이 된다. 대체로 잿빛 시멘트의 면적인 그 평면 위로 몰락의 징후들이 내려앉는다. 떨어진 꽃잎들, 곰팡이들, 부식의 자국들 등등... 그런데 그 몰락의 징후들은 분명하면서도 불투명하다. 그것들은 분명 필연적인 소멸의 증거인데도 어쩐지 우연한 도형 혹은 문양처럼 보인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그 문양들은 읽기를 요청하는 텍스트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텍스트의 끝에는 예기치 않은 색의 전복이 있다. 시멘트 잿빛이 돌연 선연한 레드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도가 없음에도 사진들 안에 모종의 코드가 있다면, 그 무의도적 코드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앞서 짐작했듯 김기태의 시선 안에 그 어떤 환멸의 경험이 들어있다면, 그 경험은 두 가지 시선의 자세를 불러올 수 있다.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시선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물과 세상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는 것이 허무주의라면 김기태의 경우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곳곳의 장소와 순간들을 포착하면서 사물과 공간의 이미지들을 애써 만들지도 않았으리라). 김기태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회의주의자의 시선을 갖고 있다. 회의주의는 사물과 세상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 사이에서 그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는 중립적 자세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중립적 시선이 다름 아닌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는 의도도 없고 의미도 모른다. 다만 피사체 그것들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 의미에는 도통 관심이 없지만 사물들 자체에게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매혹되는 시선을 우리는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사물과 만나는 첫 시선, 곧 어린아이의 시선일 것이다. 어른들은 이 첫 번째 시선으로 해후한 사물들에게 금방 의미를 덧씌우지만, 아이의 시선은 그가 만난 사물들의 첫 이미지에 끌리고 매혹 당한다. 미리 주어진 사물의 의미들을 신뢰하지 않는 김기태의 회의주의적 시선은 다름 아닌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사물들에게 다가가는 어린아이의 첫 시선을 닮았다. 그의 이미지들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건 허무와 환멸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코드도 미리 지니지 않은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태의 회의주의적 시선이 다만 사물들에 대한 첫 이미지들만을 포착하는 데에서 끝나는 건 아니다. 더 주목해야 하는 건 그렇게 포착된 의미 부재의 이미지들이 역설적으로 일종의 의미 게임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프레임 공간 안으로 포착된 사물의 이미지들 앞에서 보는 이들은 그 어떤 의미들을 투사하도록 유도당하고, 그렇게 유도된 의미의 투사들은 자꾸 반복되고 확대되면서 의미들의 증식을 일으킨다. 안에 의도를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김기태의 사진들은 그러한 의미게임으로 보는 이들은 초청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 스스로 사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다만 사물들을 포착해서 평면 위에 배치하면서 프레임 공간을 의미유희의 운동장으로 제공하는 프레임 구성 테크닉도 그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사진들은 바르트가 보았던 케르테즈 (Andre Kertesz)의 사진들과 유사해진다. 바르트는 말한다: “케르테즈의 사진들은 위험하다. 그의 사진들은 너무 많은 의미들을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카메라 루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기태의 사진들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천진스럽다. 위험한 건 그가 공간과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의 운명, 모든 형태가 있는 것들은 시간 안에서 지워지고 소멸한다는 엄연한 존재의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진스러운 건 그러한 존재의 조건들을 알면서도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잿빛의 시멘트 공간을 생생한 붉은 빛의 공간으로 어린아이처럼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김기태는 위험하면서도 천진스러운 회의주의자다. 그런데 다름 아닌 카메라가 본래 그렇게 천진하면서도 위험한 매체가 아니던가. 

(김진영. 미학. (사) 철학 아카데미 대표)   


■ 작가 약력

김기태 (金起泰, Kim Ki Tae)

1997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졸업
1999년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사진학과 석사
개인전 <늘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SPACE22), <마음속의 표적>(게이트 갤러리), <부유하기-낯선 시간 낯선 공간으로>(서남아트센터) 외에,  기획․그룹전으로 <Sema>(서울시립미술관), <만화경>(아트스페이스 집), <기억하는 거울>(세종문화회관), <The family>(가스카이미술관, 일본), ‘맹인학교 프로젝트’ (보다)>展, <서울 문화 식민지>(공간대기), <가족展>(서울시립미술관), <오류인터체인지>(성곡미술관), <사진학개론>(아트선재미술관), <바다의 촉감>(세종문화회관)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신구대학 사진과, 숙명여자대학교, 백제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