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준의 Plastic 물질의 재탄생 ,
미술평론가 유현주
플라스틱의 생명
사진작가 한희준의 플라스틱 작업은 사실 물질의 생명 이라는 화두와 관계가 있다
2014년 사라예보의 전시에 참여하는 동안 플라스틱 물병에 관한 사색은 그의 작업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그때 그는 가장 깨끗하기로 유명한 사라예보의 물을 겨우 하찮은 일회용 플
라스틱병으로 마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싸구려 플라스틱병이
사라예보뿐 아니라 세계 곳곳을 떠도는 난민처럼 보이기 시작하였고 상품으로 포장된 아픈 자연‘’
으로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가는 플라스틱 물병들이 영혼을 잃은 신체 즉 자본의 노예
가 되어 혹사당하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시선으로 작가는 플라스틱이란 물질과
.
우리의 생활 세계에 대한 깊은 번뇌를 담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사진예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플라스틱을 자연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간주하는 태도일 것이다.
생기론 철학자 제인 베넷이 그의 책 생동하는 물질 에서 동물이 사회적이고 의사소통을 하며
생각하는 삶을 산다는 주장에는 사람들이 동의하는데 금속과 같은 비유기적인 신체 역시 생명 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베넷은 유기적인 생명뿐 아니라 비유기적인 물질에도
역시 생명이 내재한다고 보며 하나의 생명은 약동하는 활기 또는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힘 존재 라고 정의한다 모든 물질에 변화무쌍한 생명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 철학자의 견해
를 인용하는 이유는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안타까운 생명으로 여기는 작가의 관점과 유사성을
갖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에 생명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플라스틱은 석유에서 추출한 탄소화합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간에 의해 변형된 물질이다 합성
섬유 페인트 전자제품 건축재 페트병 등의 원료인 석유로부터 화학적 과정을 거쳐 폴리에틸렌
이나 폴리프로필렌으로 생성된 고분자 물질이 바로 플라스틱이다 본래 석유는 사체의 혐기성 분
해로 인해 생성된 수억 년 전의 화석연료이다 석유 자체가 이미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었지만 그
것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썩지 않는 물질로 가공되어 쉽게 쓰고 버려져 마침내 잘게 부서진
미세 물질 로 떠다니며 해양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21세기
플라스틱이다 본래의 성질을 잃은 생명체로서의 플라스틱은 작가에게 언뜻 방부 처리된 시체 즉
미이라 로 보였을 법도 하다 결국 작가는 플라스틱 내면에 깃든 오랜 지구의 생명체들을 의식하
고 그것들의 신체가 재배치되어 완연한 인공적인 사물로 태어났으나 지구에 파괴적인 존재로 변
형되어버린 그 물질의 어디에선가 터져 나오는 무언의 외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이리다.
빛의 그림 을 통해 다시 자연으로
플라스틱의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주고자 시작한 한희준의 사진 작업은 아날로그적인 방식
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 수공 적인 것으로서 시아노 타입 과 검프린트 기법 으로
인화하는 초창기 사진 기술인 청사진 기법을 활용한 것
이다 작가가 포토그라피 즉 어원 그대로 빛 으로 그리는 회화적 사진 기술을 활용하여 인화한
사진을 통해 플라스틱은 낯선 사물로 태어난다 이 새로운 탄생의 비밀은 반기계적인 작업으로부터
나온다 말하자면 감광제를 종이에 발라 인화지를 만든 후 강황 가루 혹은
철 가루 와 물감을 그 위에 뿌리고 때로 비누 거품을 불어 넣기도 하면서 작가가 자유자재로 변
형시킨 플라스틱 물병을 올려놓은 후 화학적 반응으로 색이 변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수채화지에 인화된 플라스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낯선 사물로 등장한다 물통이라
는 용도를 벗어나 플라스틱 본연의 얼굴을 내밀면서 이 낯선 사물들은 망각했던 생명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듯 뇌리를 스치듯 번쩍이는 빛 속에 즉 예술 언어의 섬광 속에서 나타난다
회화적 느낌을 강하게 주는 사진 기법인 검 바이크로메이트 프린트 로
인화한 2019년 플라스틱 시리즈는 세상의 모든 플라스틱 물병들의 초상화라고 할 만하다 백산수등
각양각색의 물병들이 무슨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하나의 화면 중심에
위치해 관객을 정면으로 주시한다 생각지도 못한 사물들이 주인공이라니 잠시 당황스럽기도 하
고 다소 키치와 같은 농담 섞인 느낌도 들지만 사람들은 그 가치 없다고 여긴 사물을 다시 주목
하고 사진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까운 한희준의 진지한 작업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2020년의
일부 작품들은 물병이라는 인상을 거의 지워버린 사진 작업이다 종이 위에 스케치하듯 찍혀진 희
미한 플라스틱병의 흔적은 그 존재들의 무가치함 의 의미를 오히려 더욱 부각시킨다 그런가 하
면 시아노 타입을 사용해 강한 청색 배경과 빛으로만 표현한 플라스틱병 사진들은 모종의 전자기
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푸른 빛 유령처럼 섬뜩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가 플라스틱을 해체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것인데 엔트로피법칙에 의
해 이전의 형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물질의 비가역성 즉 물질에 내재한 죽음 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명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 작가는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자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며 그것이 파괴적인 것이 아닌 선한 생명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생성 의 철학자 들뢰즈는 생명은 오직 잠재성만을 갖고 있으며 실재이긴 하나
현실적이지는 않은 변화무쌍한 무리 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생명이 창조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생명 자체가 잠재적 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플라스틱은 실제로 바이오매스와
같은 물질로 생분해되거나 다시 석유로 돌아갈 가능성을 진단받고 있다 한희준의 작업에서도
암시하지만 폐플라스틱병들이 예술이라는 옷을 입고 상징적으로 부활할 때
플라스틱에 잠재된 생명을 자연으로 환원시키게 될 꿈 역시 언젠가 실현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