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노트
우물가에 핀 목단, 할머니 치맛자락에 숨은 아가의 해맑은 웃음.
붉은 바위에 핀 하얀 찔레꽃잎을 입에 문 아이의 싱그러운 얼굴.
징그러미에 핀 해당화 앞, 꿈꾸는 소녀의 당찬 표정.
집 마당, 봉숭아 꽃 손에 물들이는 처녀의 수줍음
노력도로 시집가는 그 처녀는 붉은 동백꽃 아래서 눈물을 흘린다.
이른 아침, 보라색 도라지꽃 몽우리 터트리며 울음 참는 새댁이 안쓰럽다.
딸에게 장미꽃 코사지 달아주는 표정에는 뿌듯함이 스친다.
장날, 자기만을 위한 꽃을 사는 사치를 부리는 그녀가 귀엽다.
달빛 아래 목련이 그녀에게 말을 건다.
가을날 국화꽃 향기 한 모금 마시고 힘을 내는 여인의 손끝이 야물다.
담벼락 능소화 쓸어 담는 여인의 굽은 등이 간절하다.
장독대 채송화 앞에 앉아 숨죽인 그녀가 애처롭다.
그녀는 죽었고, 내 사랑은 그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이 가득하다. 나는 우울함을 품고 살아간다. 애써 기억해 내야만 창백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고향으로 차를 향한다. 그녀가 떠나고 삼년의 시간이 지나 처음 간 그녀의 섬은 전과는 다른 곳이다. 그녀의 꽃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곳의 꽃들은 저 멀리 바다로 밀려났다. 찬바람 가득한 동백의 자리에서 그녀를 만난다. 기억의 혼잣말과 나의 종알거림에 그녀는 조용히 화답해 온다.
엄마로만 평생인 그녀에게 물었다.
“엄만 다시 태어나면 뭐 하고 싶어?
“꽃집 하고 싶어”
모두 이야기 한다. “꽃을 엄청 좋아했지”라고,
꽃이라면 달력의 것까지도 오려서 간직했던 그녀를 기억한다.
엄마의 시작과 마지막인 작은 섬, 노력도에서 그녀의 삶을 떠올린다. 엄마와 함께 바다속으로 흩어져 버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이내 바람이 앗아간다. 구름에 가려 희미한 섬처럼 엄마는 그렇게 내 앞에 선다.
충분히 지친 날, 시들지 않고 그녀의 기억을 간직한 채 말없이 내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그 꽃들을 찍어본다. 그녀의 흔적을 움켜쥐고 싶은 간절함에 불을 끄고 다른 공간의 약한 빛을 모으기 위해 카메라에게 긴 시간을 준다. 바람이 사라지고 조곤조곤 엄마의 목소리가 다가온다.
가보지 못한 꽃길, 바라만 보던 그 꽃길에 엄마가 선다. 꽃이 가득 피어있는 길을 그녀와 걷는 소망을 담아 골목길의 조화를 바라본다.
계절과도 무관하고, 그 길과도 무관하고, 어색함 가득한 그 곳의 조화들은 단지 하나를 기억한다. 그것을 사이에 두고 함께 했던 그 시간만을 기억한다. 내 마음은 화려한 시절만을 기억하는 고약함을 거부한다. 슬픔이 분노로, 분노가 그리움으로 그래서 더 간절하고 결국 가슴 저린 행복의 순간으로 꽃이 지듯 내가 그곳으로 진다.
엄마의 꽃자리에 누우니 분분(芬芬)한 꽃향기가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