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습 개인전 《생방/방생》
물에 잠긴 광화문, 재난 이후에도 반복되는 인간의 풍경
□ 스페이스22(대표 오혜련)는 미술작가 조습의 개인전 《생방/방생》을 2026년 9월 11일(금)부터 10월 8일(목)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2019년 상업화랑에서 연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이다.
□ 《생방/방생》은 거대한 홍수로 물에 잠긴 광화문을 배경으로 재난 속 인간 군상을 그린다. 도로와 광장은 흙탕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뗏목 위에서 먹고 노래하며 자신과 주변을 촬영한다. 누군가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아이에게 음식을 건넨다. 생존과 욕망, 돌봄과 구경, 비극과 희극이 하나의 풍경 안에서 뒤섞인다.
□ 이번 전시는 조습의 작업 방식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동안 작가는 자신과 배우들을 실제 공간에 세우고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기억을 재연한 뒤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왔다. 이번 신작에서는 처음으로 AI 이미지 생성 기술을 제작에 활용해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광화문의 홍수와 그 안의 인물들을 구현한다.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을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생성하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 작품은 물에 잠긴 광화문을 밤과 낮의 두 장면으로 보여준다. 밤이 지나 낮이 되고 젊었던 인물들은 노인이 되지만, 이들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재난 속에서도 먹고 노래하고 촬영하며 자신의 모습을 생중계한다.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비극마저 실시간으로 촬영·공유되고 콘텐츠로 소비되는 오늘의 모습을 드러낸다.
□ 작품 속 반복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과도 겹쳐진다. 생성형 AI로 하나의 오류를 수정하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오류가 나타나고, 완성했다고 생각한 이미지는 다시 제작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조습은 생성과 오류, 수정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며 AI를 단순한 제작 도구가 아니라 작가의 통제와 끊임없이 충돌하는 대상으로 다룬다.
□ 전시 제목 《생방(生放)/방생(放生)》은 서로 뒤집힌 두 단어를 병치한다. ‘생방(生放)’이 지금 벌어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소비하는 오늘의 이미지 환경을 가리킨다면, ‘방생(放生)’은 붙잡힌 생명을 놓아주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작품 속 생명은 온전히 놓여나지 못한다. 눈앞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실패와 욕망, 이념, 이미지를 소비하는 습관을 인간이 끝내 놓아주지 못하는 실패가 한 화면 안에 겹쳐진다.
□ 조습은 이번 전시에서 몸과 카메라를 통해 반복해 온 ‘재연’을 생성 이미지의 영역으로 옮긴다.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이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시대, 《생방/방생》은 재난 이후에도 반복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전시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스페이스22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붙임 1. 전시 평론 글 – <실패한 방생放生>(채지수/이미지 비평)
2. 전시 작품 소개 – 생방 生放/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26
방생 放生/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26
붙임1.
〈실패한 방생放生〉
채지수 / 이미지 비평
비 내리는 광화문
인류는 오래 전부터 홍수를 세계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상상해 왔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든 성경 속 노아의 방주든, 신화와 종교는 홍수 뒤에 다른 시대가 온다고 되뇌어 왔다. 그러나 조습의 작품에 등장하는 광화문의 홍수는 이 오래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폭풍과 번개, 계엄군을 연상시키는 헬리콥터와 흙탕물이 광화문을 묵시록적 재난의 공간으로 만든다.
광화문은 오랫동안 권력과 기억이 교차해 온 장소다. 국가 기념식이 열리고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가 같은 자리를 지나갔으며, 노동자의 행진과 시민의 축제가 번갈아 이 거리를 채웠다. 서로 다른 이념과 요구가 충돌해도, 광화문은 그 모든 장면을 껴안는 하나의 무대였다.
조습이 설정한 홍수는 이 무대를 순식간에 침수시킨다. 아스팔트는 흙탕물 아래 묻히고 차선과 보행의 경계는 사라진다. 뗏목에서 조금 떨어진 물 위로 대형 노란 리본 모양 조형물이 떠 있다. 이 리본은 눈앞의 홍수가 그저 상상된 재난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 사회가 실제로 치러 온 애도와 기억의 역사에 포개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물이 모든 경계를 삼켜도, 이 장소가 품어 온 기억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이 차오를수록 광화문에 오래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기억이 되돌아온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광화문의 밤은 청명한 하늘의 낮이 되고, 젊은 몸은 늙은 몸으로 바뀌지만, 사회가 짜 놓은 안무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재난은 삶을 멈추게 하기보다 평소의 행동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풍경이 초현실적이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이미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기보다 먼저 촬영하고 공유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관객 역시 이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복잡하고 장대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며 그것을 즐기는 동안, 뗏목 위에서 타인의 재난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위치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결국 광화문을 뒤덮은 물은 화면 안과 밖의 경계마저 흐려 놓는다.
난파선과 구조선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제리코의 뗏목이다. 조습은 제리코의 삼각형 구도와 구조를 요청하는 인물의 몸짓을 빌려오지만, 그 의미를 뒤집는다. 제리코의 난파자들이 수평선 너머의 구조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다면, 여기에서 그 신호는 화면 밖의 카메라, 곧 관객을 향한다.
이 차이는 두 작품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다. 제리코의 뗏목에는 아직 구조될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조습의 뗏목에는 그들을 데려갈 구조선이 없다.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먹고 노래하고 촬영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생존을 위한 배는 어느새 하나의 무대가 되고, 난파자들의 뗏목은 ‘바보들의 배’로 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재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재난속에서도 이전과 다르지 않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밤과 낮의 두 장면은 이러한 반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고 인물들은 늙어 가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 축제 같은 재난의 밤이 낮으로 바뀌어도 삶의 방식은 그대로 이어진다. 변화한 것은 시간이 남긴 흔적뿐이다.
이 장면의 힘은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데서 나온다. 과장된 몸짓과 상황은 처음에는 웃음과 황당함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웃음은 불편함으로 바뀐다. 노아의 방주가 새로운 세계를 향했다면, 이 뗏목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밤이 낮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늙어 가는 동안에도 같은 행동은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들의 표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생성된 홍수, 사진에서 이미지로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장면들이 실제로 촬영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습은 그동안 자신을 배우이자 연출자로 삼아 실제 사건 현장과 유사한 무대를 꾸미고, 그 안에 직접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 온 작가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이것이 실제로 렌즈 앞에 있었다’는 지표성은 그의 풍자가 힘을 얻는 최소한의 근거였다.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허술한 장면이라도, 그것은 어떤 순간 카메라 앞에 실제로 존재했던 몸과 사물의 기록이었다.
〈생방/방생〉에서는 이 지표성 자체가 사라진다. 광화문도, 뗏목도, 인물들도 렌즈 앞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이미지는 촬영된 것이 아니라 생성된 것이다. 그런데도 화면은 여전히 원근과 빛, 질감과 그림자와 같은 사진의 문법을 빌려 스스로를 사실처럼 제시한다. 관객은 익숙한 사진적 사실성을 신뢰의 근거로 삼아 화면 안으로 들어가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서로 다른 시간과 현실, 인물의 몸이 이어 붙은 자리에서 미세한 어긋남을 발견하게 된다. 기록과 연출의 경계가 아니라, 애초에 무엇을 기록할 대상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사진의 문법은 의심의 대상으로 바뀐다.
이 지점에서 모리 마사히로의 ‘불쾌한 골짜기’를 사진적 이미지의 차원으로 확장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조습의 작업이 소환하는 불편함은 인간을 닮은 로봇 앞에서 발생하는 감각이 아니라, 사진을 닮은 이미지 앞에서 발생하는 감각이다. 화면은 사진이 보증해 온 신뢰의 코드, 즉 빛의 방향, 그림자의 길이, 표면의 질감을 정교하게 흉내 내면서도, 그 신뢰가 원래 의지하고 있던 조건, 즉 카메라가 실제로 어느 한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갖고 있지 않다. 낯익은 형식과 실재하지 않는 대상 사이의 어긋남이야말로 조습이 사진에서 생성 이미지로 매체를 옮기며 얻은 새로운 종류의 ‘불쾌한 골짜기’다.
이 전환은 단지 제작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조습의 작업 전체를 관통해 온 질문 “우리는 무엇을 보고 믿는가”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이전까지 그의 사진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실제로 연출되고 촬영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풍자의 일부였다. 배우들은 실제로 진흙물에 몸을 담그고, 그 자리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생방/방생〉에서는 그 최소한의 실재성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같은 풍자가 이뤄진다. 관객은 이제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를 묻는 대신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재난을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공유하는 시대의 인간 군상을, 정작 그 자신도 촬영이 아니라 생성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담아낸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스스로가 비판하는 이미지 소비 방식과 같은 기술적 조건을 공유하는 역설을 안고 있다.
조습이라는 이름, 되풀이되는 과거
이 역설은 조습이라는 작가의 작품 제작 이력 안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화면 안에 세우는 셀프 포트레이트 기법으로 작업해 왔다. 스스로 배우 겸 감독이 되어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참사를 재해석하고,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블랙 유머로 비틀어 왔다. 조습은 은유와 상징이 뒤엉킨 재연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남긴 상처와 그것을 잊어버리려는 사회의 습관을 함께 건드려 온 것이다.
〈생방/방생〉 역시 이 계보 위에 있다. 광화문이라는 장소, 뗏목이라는 형식, 우스꽝스러운 군중이라는 소재는 모두 그가 계속해 드러낸 주제, 한국 현대사가 남긴 상처, 그것을 소비하고 망각하는 인간의 욕망과 부조리라는 연장선에 있다. 다만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직접 흙탕물에 담그는 대신, 자신이 만든 프롬프트가 그 몸을 대신 만들어 낸다. 작가가 카메라 앞에 서던 자리에는 이제 생성 모델이 서 있다. 이것은 제작 방식의 교체 너머 ‘과거를 재연하는 행위’ 자체가 신체적 수행에서 알고리즘적 산출로 옮겨 갔다는 점에서, ‘기억과 반복’이라는 주제를 매체의 층위에서 한 번 더 되풀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몸으로 반복해 온 과거를, 이제는 이미지 생성 기술을 통해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이미지
생성 모델이 작가의 몸을 대신했다고 해서 제작 과정이 간단해진 것은 아니다.〈생방/방생〉의 제작은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이미지를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프롬프트를 쓰고,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 안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다시 수정하면 또 다른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발생한다. 손가락의 개수가 달라지고, 신체의 구조가 무너지며, 사물의 형태가 뒤틀린다. 하나를 바로잡으면 멀쩡하던 다른 부분이 변하고,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다시 제작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프롬프트 → 생성 → 오류 → 수정 → 또 다른 오류의 과정이 반복된다.
생성 모델이 작가의 몸을 대신한다는 말은 그래서 절반만 맞다. 과거 조습이 카메라 앞에 세웠던 자신의 몸과 배우들은 적어도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다시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같은 자세를 반복하거나 몸의 방향을 조금씩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 자리를 대신한 생성 모델은 명령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명령에서 벗어난다. 손을 고치면 팔이 달라지고, 팔을 바로잡으면 옷의 형태가 변하며, 하나의 사물을 정확하게 만들려는 순간 이미 완성되어 있던 다른 부분이 무너진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연출하던 감독에서, 이제 자신의 지시를 오해하고 변형하는 이미지와 협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점에서 〈생방/방생〉의 생성 과정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의 문제다. 프롬프트는 명령문처럼 보이지만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지 않고, 수정은 완성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작가는 같은 요구를 조금씩 다른 말로 반복하고, 생성 모델은 그때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실패를 되돌려준다.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만큼이나 이미지의 오류를 발견하고 판단하고 수정하는 행위가 중요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작 과정 자체가 〈생방/방생〉이 다루는 세계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는 홍수가 반복되어도 인간의 행동이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제작 과정에서도 하나의 오류를 바로잡으면 다른 오류가 나타나고, 작가는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 재난 이후에도 이전의 행동을 반복하는 인간과 수정 이후에도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생성 모델이 서로 닮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번 작업에서 AI의 오류는 완성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제거해야 할 기술적 결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 조습의 작업에서 반복이 역사와 인간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그 반복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로 들어온다. 〈생방/방생〉에서 반복되는 것은 화면 속 재난만이 아니다. 이미지를 완성하려는 시도와 그것을 끊임없이 어긋나게 만드는 실패 또한 반복된다. 실패는 더 이상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실패는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 자체가 된다.
우리는 아직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조습은 광화문의 홍수를 그리지만, 그의 관심은 물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인간에게 있다.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존재하는 군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화면 속 인물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먹고 웃고 촬영하고 구경하는 이들 곁에는 서로를 붙들고 아이에게 음식을 건네고 물속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이들도 있다. 어리석음과 욕망, 생존과 돌봄은 한 뗏목 위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관객은 이들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자신 역시 뗏목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든 인물들과 닮아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장관을 즐겨 보는 관객이기도 하다.
방생(放生)은 생명을 놓아주는 행위지만, 조습의 화면에서 생명은 온전히 놓여나지 못한다. 뗏목은 인간들로 가득하고 동물들은 물속에서 헤엄치거나 떠밀린다. 이 작품의 실패는 두 겹이다. 눈앞의 생명을 제대로 구해 내지 못한 방주의 실패, 그리고 욕망과 이념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습관을 인간이 끝내 놓아주지 못한 실패다. 여기서 실패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의식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능력 그 자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홍수를 두려워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홍수인가, 홍수 뒤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인가. 카메라도 없이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있게 된 이 홍수의 이미지 앞에서, 그 질문은 이전보다 한층 다급해진다.
물은 세계를 지웠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은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이 이 실패한 방생의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