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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Saw
2021-09-01-2021-09-28
윤길중
 
seesaw bo 01 _ peach
 

■ 전시 개요


다양한 주제와 실험적 사진 작업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윤길중 사진가의 개인전 <SeeSaw> 전시가 9월 1일부터 28일까지 SPACE22에서 열린다.


이번에 선보이는 ‘SeeSaw’ 시리즈는 통념적 사진 이미지를 벗어나 시각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윤길중 사진가는 이미지를 낯설게 하기 위해 실물과 모형을 섞거나 사물을 불에 태워 촬영하고, 촬영한 이미지를 해체하여 직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오브제를 바라보는(see)데 오히려 방해요소를 개입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물의 시각적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SeeSaw’시리즈는 두 가지 구성으로 제작되었다. 하나는 실물과 모형을 섞어서, 그리고 하나는 과일 등 오브제를 불에 태움으로써 색을 지워 촬영했다. 또한 사진을 찍은 뒤 같은 사진을 전통 한지에 두 장 프린트한 후 씨실과 날실의 형태로 잘라 천을 짜듯 직조한 작품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를 다른 개념이나 형태로 바꾼 형식을 취한다.


이번 전시와 함께 그의 다섯 번째 작품집인 <SeeSaw>를 함께 선보인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출판한 이번 작품집은 2015년부터 이어온 탐구의 결과물을 한데 망라한 작품집으로, 총 120페이지 50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 평론


해체와 재조합, ‘봄’과 ‘보았음’


김석모 (미술사학자) KIM Sukmo


사진의 모든 문제는 본다는 행위에서 시작해 본다는 행위로 소급된다. 그런데 본다는 것은 너무나 불완전한 인식행위이다. 우리의 눈이 만들어낸 상은 객관적이지 않을뿐더러 어떤 대상이나 사건 혹은 현상에 대한 제한적 경험만을 제공한다. 그나마도 부정확하고 오류투성이다. 보고, 인식하고, 기억하고, 판단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사이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오차, 오류, 왜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진기라 불리는 기계장치가 인간의 시각적 인지의 오류와 한계를 보완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사실 사진기가 만들어낸 이미지도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그 불완전성 때문에 사진은 기록수단에서 예술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했다.


윤길중의 연작 <SeeSaw>는 본다는 행위 자체를 화두에 붙이고 있다. 한지에 인쇄된 대상들은 평범한 정물처럼 보이지만 여러 층위의 작가적 개입이 예술적 장치로서 잠복해 있다. 우선 사진 속에는 실재대상과 그것의 모형이 교묘히 혼재한다. 예를 들어 파프리카나 사과, 해바라기나 국화 중 어떤 것은 진짜이고 어떤 것은 모형이다. 일상적 인식은 보고, 느끼고, 맡고, 맛보고, 들어 보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만약 다른 감각이 배제된 채 오로지 시각 정보에만 의존해야 한다면 진짜와 모형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물론 오감을 통한 경험 역시 너무나 불완전한 것이어서 아주 쉽게 우리를 기만한다.


실재와 모형의 혼재가 형태적 유사성으로 인해 시각적 혼란을 야기했다면 대상을 검게 태움으로써 형태와 색채 변형이라는 또 다른 개입이 이루어졌다. 프라이팬에 검게 타버린 생선이나 라면, 통마늘 혹은 석류 등과 같은 대상들은 검게 타버려 고유색을 상실했다. 형태의 고유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색채변형으로 부터의 영향이 적고, 시인성(視認性)이 약한 대상일 경우 식별불능의 상태가 초래된다. 태움의 개입은 감상자의 시각적 인식에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대상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작가 윤길중의 작업을 전통적인 회화 장르로 분류하면 정물에 속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정물은 근본적으로 인생의 덧없음, 다시 말해 바니타스(vanitas)를 의미한다. 탐스러운 과일은 머잖아 벌레 먹어 썩게 되고, 화려함을 자랑하며 활짝 핀 꽃도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지게 마련이다.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도 꺼져가는 불꽃 앞에서는 부질없다. 검게 탄 윤길중의 대상들 역시 그러한 상징을 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통 정물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무용한 것으로 회귀되었다면, 사진 속 정물들은 인위적으로 태워졌다. 태워졌지만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표면이 그을렸을 뿐 형태의 치명적인 훼손이나 변형은 가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첫 번째 작가적 개입과 대조를 이룬다. 


모조품은 진짜와 외형적 유사성만 가질 뿐 근원적으로 같지 않다. 하지만 그을린 정물은 비록 색채는 달라졌지만 원래적 형질(形質)을 보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단서들을 종합해 개별 이미지들을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실제와 허구, 가치와 무가치, 본질과 비본질이 혼재하는 현실의 속성 그리고 그것을 감각에 의존해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완전성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감상자에게 던져주는 이러한 질문들은 또 다른 장치에 의해 강조된다. 이것은 작품 전체의 시각적 인상을 결정짓는 기법이기도 하다. 윤길중의 작품은 낱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일한 이미지를 두 장 출력하고 한 장의 특정 영역을 사각형태로 선택해 가로 혹은 세로로 일정한 너비의 촘촘한 띠처럼 정밀하게 절단한다. 그렇게 되면 화면의 사각 영역 속의 이미지는 절단된 형태로 붙어 있게 된다. 이제 다른 한 장의 사진에 동일한 영역을 선택하고 그 부분은 앞서 절단된 부분과 너비는 동일하지만 교차된 방향으로 자른다. 두 번째 이미지는 띠 형태로 분리되고 이것을 다시 씨실과 날실을 교차해 직조하듯 첫 번째 이미지에 엮는 방식으로 작품이 완성된다. 그 결과 작품의 이미지가 얼핏 모자이크나 작은 화소의 결합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실재 대상과 모형의 혼재, 그을린 물건들 그리고 이미지의 해체와 재결합을 통한 삼중적 조형구조가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작가가 일반 인화지 대신 전통한지를 사용한 이유도 작업 방식에 따른 기술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투박하고 불규칙적인 한지 표면의 질감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서정성과 표현력이 탁월한 매력을 지녔지만 무엇보다 재료적 견고성이 번거로운 제작과정에서 가해질 수밖에 없는 물리적 힘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윤길중의 <SeeSaw> 연작은 일상적인 대상을 초상사진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본질을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다. 모든 대상들은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있고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 경험은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 인간 인식의 한계는 세계를 오로지 관계성 속에서만 경험 가능하다는데 있다. 시간적 관계, 공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 종교적 관계, 심리적 관계 어느 것이 되었건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순수 인식이란 관념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비어 있는 화면에 초상사진 방식으로 대상을 제시한 것은 최소한의 중립성을 확보를 위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화면 속 이미지에서 관찰된 대상이 부분적으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생각이 그런 질문에 다다를 개연성도 낮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보고 있지만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 보았지만 본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보고 있는 것과 본 것 사이에 왜곡을 일으키는 수많은 요소들의 개입. 윤길중의 작업은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보고 있음’과 ‘본 것’ 사이에 발생되는 여러 인식현상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결국 작품이 향하고 있는 화살 의 끝은 감상자를 가리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 작업노트


SeeSaw


 어느 날 결혼식장에 세워진 화환 대부분의 꽃들이 조화이고 몇 송이만 생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화든 생화든 축하의 의미로 세워진 꽃들이니 의미만 전달되면 그만일 수 있다. 경제적인 논리나 편리함 때문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모형들이 실물을 대체해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꽃이나 과일, 나무 그리고 음식까지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실물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형들이 정교하다. 시각만으로는 잘 구분할 수 없고 후각이나 촉각을 통해 그 차이를 겨우 알아차릴 수 있다. 카페 창가에 놓인 꽃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가가 살펴보지 않아 그 꽃이 조화인지 생화인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실물과 모형을 뒤섞어 정물 촬영을 시작한 이유다. 평면이미지로 옮겨진 대상들은 더욱 더 구별이 쉽지 않다. 


 팬에 생선을 굽다가 깜박하는 사이에 생선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이전까지 내 기억 속에 저장된 구운 생선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형상과 색으로 사물을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사물의 색을 지운 후에는 형상만으로 사물을 인지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물을 본다(see)는 것과 봤다(saw)는 것의 간극은 크다. 과거가 되는 순간부터 기억에 왜곡이 일어나고 사물의 본질과는 괴리가 있는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억 속에 고정관념이 된 이미지로 사물을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사물에 변형을 줌으로써 낯설게 하고자 불에 태워 촬영을 했다. 색을 지워버린 사물들은 이전까지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데 멈칫할 것이다. 


 나는 실물과 모형을 함께 찍은 사진들, 그리고 사물을 불에 태워 색을 지우고 찍은 사진들을 프린트한 후 이미지들을 해체해버리고 싶은 장난끼가 발동했다. 똑같은 사진을 두 장 프린트해서 한 장은 수직으로 자르고 한 장은 수평으로 잘랐다. 그러자 사진 속 사물들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파편으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잘게 잘린 두 장의 사진을 씨줄과 날줄을 직조하듯 엮어 자르기 전의 이미지로 재조합 했다. 이미지의 조각들을 퍼즐놀이 하듯 하나하나 맞춰 나가면서 사진에 박제된 피사체를 전에 없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인지했다는 것인가! 시각적 습관 그리고 익숙함은 사물을 깊이 있게 인지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실물과 모형을 뒤섞고 대상을 불에 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이미지들을 해체해 재조합 함으로써 감상자가 대상을 인지하는데 혼란을 가중시킨 건 사물의 본질에 한발 다가가보려는 나의 사진적 행위로 봐주길 바란다.

                                                                                                            윤길중



■ 작가약력


윤길중 


개인전

2021  <SeeSaw> 스페이스22, 서울

2020  <Human Desire> 아트스페이스 루모스(대구), 서이갤러리(서울)

2019  <오브제_소멸과 재생> 아트스페이스 루모스(대구), 류가헌(서울)

2018  <큰법당> 류가헌, 서울

2017  <천인상> 갤러리 인덱스, 서울

2017  <석인> 서학동사진관, 전주

2016  <석인의 초상> 갤러리 사이, 서울

2015  <기억흔적> 류가헌 (1, 2관), 서울

2015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 서울시청

2014  <picturesque-詩畵> 갤러리 나우, 서울

2013  <노란들판의 꿈> 혜화역전시관, 이음책방, 동숭동헌책방, 서울


그룹전

2021 Budapest Photo Festival, 한국문화원, 헝가리

2020 부산국제사진제, 부산

2019 <Brussels Photo Festival> (Hanger Gallery) 벨기에

2019 <INTERSECT> (FotoFest) 휴스턴

2019 <Head On Photo Festival> 호주

2017  KIAF art Seoul 2017 코엑스, 서울

2017  전주국제사진제 <초월의 숨결> 전주향교, 전주

2017  <Art Stage Singapore 2017> 싱가포르 

2016  <Brisas de Corea> Geleria Saro Leon, 스페인

2015  5인전 <기억된 풍경> 공간291, 서울

2014  동강국제사진제 <Growing Up> 영월문화예술회관, 영월


출판  

 <SeeSaw>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2021)

 <Human Desire> (AKAAKA & Lumos, 2019)

 <기억흔적> (이안북스, 2016)

 <석인> (이안북스, 2017)

 <큰법당> (류가헌, 2018)


작품소장

 FotoFest, 휴스턴

 Foto Relevance, 휴스턴,

 서울시청

 아트스페이스 제이

 아트스페이스 루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