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노트
‘공空에서 인연因緣으로
존재存在에서 다시 공空으로’
‘Emptiness for Bond,
Existence for Emptiness.’
The Planet
2007-2017
죽음, 즉 소멸의 가장 큰 발명품은 생이다. 오늘이 얼마나 참혹하거나 혹은 황홀하여도 다음날이 되면 역시 해는 떠오르고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나면 가을을 거쳐 겨울로 사그라든다. 물은 봄을 축복한다. 생이 왔음을 환호하고 대지는 환한 꽃으로 응답한다. 물방울은 하나마다 삼라만상을 적시며 세상을, 현생의 온 우주를 표면에 반영한다. 물은 모든 생의 일부이고 생은 물의 일부이기도 하다. 물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가로질러 무한의 세계로 흐른다. 봄의 절정, 감로수로 자연이 인간에게 보낸 선물 아기부처의 정수리를 적신다. 길을 잃은 인간들을 봄을 지나 여름으로 잘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재난의 참혹한 풍경 앞, 겨우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려보면 오히려 넘치는 생명력과 문명의 때를 벗은 아름다운 자연으로의 회기를 발견한다. 초원을 호령했던 제국들도 결국 한줌의 모래로 사라진다. 꽃은 활짝 피고 시간이 지나면 떨어진다. 언젠가 도로는 강이 되고 시멘트에도 식물은 뿌리를 내린다. 새들은 지저귀고 문지기 개들은 자유를 얻는다. 빛은 찬란하게도 이들을 비춘다.
잠이 들면 나는 철새가 되어 지구를 내려다보며 유영한다. 심연의 숲에서 날아올라 근육질 도시의 불빛을, 어머니 바다의 품을 지나 공의 사막에 이른다.
나의 뼈와 살은 어디에서 부터 왔고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나의 생을 위해 살을 내어준 생명체들의 꿈들에 빚을 진다. 태양을 떠나온 빛이 지구에 도착한다. 물과 태양은 대지와 함께 생명들을 빚어낸다.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무한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북극을 탐험하였던 물고기가 내 생의 위장을 통해 육지에 잠시 머문다. 나의 뼈와 살도 언젠가 토양을 기름지게 할 것이고 식물이 되어 꽃을 피울 것이다. 내 사진들과 원목 액자들이 언젠가 태양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갔던 숲의 일부였음을 기억한다. 유리는 그리고 모래는 어떠한가.
인생의 여름에 시작한 이 작업이 가을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었다. 인내심을 갖고 곁을 지켜준 이들에게 큰 빚을 진다.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나를 세상의 다양한 장소들로 이끌었다.
재난의 현장에서 문명 이후의 세상과 만났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의 종실이다.”
” Water is origin of things and the source of all creatures”
” 萬物之本源, 諸生之宗室”
- 관자 Guanzi 管子
■ 전시개요
전유(專有)로 기록한 지구사 다큐멘터리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 현자들은 세계를 이렇게 보았다. 세계는 어떤 절대적인 유일자로부터 만들어졌는데, 둘이 아닌 오로지 하나인 그 유일자로부터 불이 나오고, 불에서 다시 물이 나오고, 물에서 다시 음식이 나왔는데, 그 불과 물과 음식이 섞어진 데에 자아(自我)가 들어가 통합되니 만물의 이름과 모양이 나오고, 색이 나오고 언어가 나온다. 그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는 마음을 내고, 숨을 낸다. 우파니샤드 현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이 사회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유한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한한 우주의 이치다. 그 현자들에게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것, 그것이 국가든, 민족이든, 정부든 모두 다 무의미 하였다.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유일자 본질이 만들어내는 영겁 윤회의 흔적일 뿐이었다. 비오면 쓸려 가버리고,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리는 그런 흔적 말이다.
《더 플래닛 The Planet》의 저자는 우파니샤드 현자의 시각을 가진 자다. 그것은 우주 변화의 대서사다. 구체적이지도 않고 실제적이지도 않고 언어적이지도 않은 자만이 볼 수 있는 대서사. 내러티브가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서사이니 참으로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장르다. 어디에서 와서 무엇으로부터 시작했을까? 강제욱은 그 시작을 숲으로 보았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숲, 누군가가 손을 대기 시작한 숲, 이내 파헤쳐버린 숲, 좌절되어 버린 숲이 연달아 보인다. 사진가가 구성하는 내러티브가 눈에 잡히기 시작한다. 숲에서 시작한 시간은 인간의 손을 통해 건설된 도시를 거쳐, 강과 바다로 간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은 모래 바람 사막으로 사라져버린다. 그 안에서 윤회 속, 자연과 인위가 파노라마로 보이고, 그 파노라마는 겹치면서 한 겹, 두 겹, 영원한 윤회의 시간으로 수렴되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과 윤회의 메타 역사다. 눈앞에 펼쳐진 특정 사건, 그것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눈으로 파헤쳐 보여주려는 것을 넘어 인류가 자연과 문명 속에서 어떠한 공유의 관계를 만들어왔는가, 그 세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궁극적으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를 보는 것이다. 계급과 민족 혹은 국가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 환경을 보호하자 등을 강제하거나 계몽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우주의 시간, 자연의 시간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려는 것일 뿐이다. 《더 플래닛 The Planet》을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보면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 문제는 인류가 역사에서 특히 현대의 역사에서 당면한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사진가가 보고자 하는 궁극의 본질이 아니다. 사진가 강제욱이 찍은 환경은 문명 안에 존재하는 여러 작은 그림자들 가운데 하나 일뿐이다. 그것은 담론으로 치환할 때 환경이라 부를 수 있을 뿐 그 본래는 먹고사는 문제다. 먹고사는 문제 안에서 환경은 문명의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사진가가 보여주는 문명이라는 것은 장구한 시간의 역사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그림자 일뿐이다. 그보다 더 큰 존재인 인간조차도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 일뿐인데, 하물며 환경이나 문명에 대해서 궁극의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그 맥락에서 《더 플래닛 The Planet》는 무한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유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강제욱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0년 간 작업을 해왔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지구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찍는 이 모습이 이 문명의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 되뇌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담론 속에서 사진가는 본질을 포착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사진이라는 것은 본질을 담지 못하는 허탄한 이미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문명으로 치환되는 그 본질과 현상을 존재와 이미지로 재현할 뿐이다.
《더 플래닛 The Planet》는 사건 중심의 기록이 아니다. 드러난 현장을 저널리즘 관점으로 기록한 것도 아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도 않고, 사진으로 재현된 어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헤치려 하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흔히들 하는 소재의 기이한 면이나 자극적인 현상을 부각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가 평범하다. 사진가의 시선은 최대한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문명의 이기를 보여주고자 할 때는 대상에 좀 더 다가가 있다. 그가 다가가서 찍은 문명의 이기들은 주로 자동차, 오토바이, 배와 같은 이동 수단인데, 이주와 정착으로 인해 문명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려는 방식이다.
내러티브는 끝 부분으로 가면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자연과의 전쟁에 대해 말한다. 숲에서 시작한 인간이 도시 문명을 지나더니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 재해의 현장들을 지나 결국 모래로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파노라마는 인간이 어머니 지구를 능멸하는 이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슬픈 이야기다. 사막에 서 있는 저 문명의 흔적을 보자. 제국의 영화란 한 순간 인간의 객기 일뿐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모래 위 문명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사람 하나가 사구 위에 앉아서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가 스르르 놓기를 반복하는 이미지가 눈에 잡힌다. 하릴없는 짓이다. 사람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 사진집에 어쩌다 나오는 사람이 보여주는 게 참으로 무의미 한 짓이다. 사진가가 전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숲으로 시작한 책은 사막도 아닌 인공 사막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더 플래닛 The Planet》는 지구사를 전유(專有)로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모사에서 기록을 지나 이야기로 간 다큐멘터리 사진의 지평이 강제욱에 의해 이렇게나 넓혀졌다.
사진비평/ 인도사 이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