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선 빛 기대어 선 집
한금선
*
목은 언어를 잃어버렸다.
침묵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소극적 증언조차 힘들다.
*
달도 어두운 그런,
검은 밤, 걸어야 한다.
소리 나지 않는, 얼음이 되어버린 눈밭을 걸어야 한다.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바싹 말라버린 날 걸어야 한다.
태양이 당신의 눈을 가려버린 날 건너야 한다.
나의 눈도 멈춘다.
*
눈동자는 멈추어 있다.
설산 너머의 기억을 이야기 할 때도
이곳 오늘의 고통을 이야기 할 때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바다건너 내일을 이야기 할 때도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두꺼운 얼음에 갇혀버린 눈동자.
절반의 태양이 온전해 지는 그날
눈물로 녹아내릴 얼음 눈동자.
*
아이의 그림, 누워있는 친구.
아이의 그림, 지붕 없는 학교.
아이의 그림, 까만 바다, 하얀 산.
아이는 심장소리만 들리는 엄마 품에 안겨서 까만 밤에 설산을 넘었다.
*
유리로 만들어진 집으로 숨어든다
유리집이 바다 속으로 숨어든다
아이는 살기위해 움직임을 멈춘다
*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 소리만 들린다.
기억의 그날이 저편의 눈동자를 움직인다.
회색눈이 바라본 흰 눈동자.
그 눈동자는 사라졌다.
*
귀만 열려있다
눈은 보지 못한다
이야기에 갇혀버린다
,
바라보자 가득 차오른다
문을 열지 못한다
멈춤이 그저 다이다
*
떠나온 곳으로,
설산을 넘어 태양이 넘어간다.
집이 파랗게 피어오른다.
떠나온 곳으로,
바다를 건너 태양이 넘어간다.
집이 붉게 피어난다.
설산을 넘어온 엄마와 파란 바다를 건넌 딸이 함께한다.
파란 집에서, 붉은 집에서.
설산위로 파란 바다가 오른다.
*
빛이 갈라선다
갈라선 빛이 내린다
저편 어둠에 눈물이 내린다.
*
고통과 일상이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가진 모든 것을 내주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고 생명을 얻는다.
■ 하늘과 빛과 집과 사진
박혜진 (문학평론가)
위대한 침묵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가장 기뻤던 건 예정된 연극 공연이 무기한 연기된다는 소식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실망도 많이 하면 병이 된다. 코로나 시절에 내가 앓은 것이 감염병만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연극을 좋아해 왔지만, 정확히 말해 내가 사랑하는 건 연극에서 경험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오직 그 순간을 위해서 작품 전체가 바쳐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대한 침묵들. 일상에도 침묵은 즐비하지만 그렇듯 깊은 침묵은 ‘불확실’을 공유하는 비언어적 순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예술적 경험이다.
애써 도달한 침묵은 우연히 발생한 침묵과 다르다. 그때 도달한 침묵은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언어의 초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부재는 표현할 길 없는 데에서 비롯된 막막함이다. 막다른 길 앞에서 느끼는 난감한 감정과도 닮았다. 반면 언어의 초월은 일종의 벅참을 동반한다. 말이 필요 없는 데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닮았고, 바다 앞에서 느낄 법한 경외감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바다에는 어떤 길도 없지만 동시에 바다에서는 모든 방향이 길이 된다.
언어는 우리를 편리하게 하지만 그 편리는 때로 우리를 구속한다. 언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결정짓고, 개념을 확정하며, 그 가운데 우리의 자유를 점령해 간다. 우리는 쉽게 언어의 볼모가 되어 주체를 상실한다. 그러나 ‘불확실’이 공유될 때,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가 된다. 불확실의 공유는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태도이며, 내 시선으로 세계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빈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때의 침묵은 막다른 언어를 구원해 주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한금선의 사진들은 침묵하는 입처럼 결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봉쇄된 수도원이나 봉쇄된 성처럼 굳게 닫힌 문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은 굳건하게 침묵하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내 나는 이 사진들의 말 없음이 부재의 침묵이 아니라 초월의 침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보이는 이 사진들에서 어떤 말도 걸지 않겠다는 결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말이 그친 곳에서 침묵이 시작된다. 그것은 위대한 침묵이다. 한금선이 침묵을 통해 초월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역설적 희망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지만 실은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 세상에 동기화될 때 우리는 보고 있으면서도 못 보고 듣고 있으면서도 못 듣는 암전의 상태에 익숙해진다.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는 방식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과 같고, 우리가 아는 마음은 우리가 모르는 마음과 같다.
예컨대 국적이란 무엇인가. 국적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지만 그 앎은 우리에게 국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언어? 민족? 문화? 국적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국적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과 같다. 난민에 대해서라면 어떨까. 우리는 난민을 가리키는 서사와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지만 난민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난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난민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과 같다.
아는 것을 부정하고 부정한 것조차 부정할 수 있는 무의 상태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의 카메라는 열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금선이 레바논 땅에 지어진 시리아 사람의 집을 찍으며 느꼈을 고민의 자취를 상상해 본다. 눈 앞에는 너무 많은 풍경들이 있었을 테지만 어떤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난민에 대해 아는 모든 이미지들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은 그가 찍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함으로써 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침묵의 대화를 시작한다. 집은 사생활을 보여 주는 대신 외곽만을 보여 준다. 누군가의 눈에 이 사진들은 아무것도 찍지 않은 사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의 눈에 이 사진들은 모든 것을 찍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극단의 시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찍은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가 찍은 것은 ‘역설’이다.
사진 속에서 어떤 집은 장벽처럼 보인다. 어떤 집은 넘어 오지 말라고 국경에 세워진 장막처럼 보이고, 어떤 집은 한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처처럼 보인다. 어떤 집은 땅 위에 잠시 정박한 배처럼 보이는데, 또 어떤 집은 누군가가 맡겨 놓고 찾아가지 않은 외로운 짐짝처럼 보인다. 프레임 속 집들은 ‘보편적인 집’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진들을 보며 집이라는 언어를 떠올리는 대신 자기 마음속에 자리한 갖가지 언어 바깥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것은 이해의 과정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오해의 과정에 가깝다.
한금선의 사진은 우리의 오해를 내버려 둔다. 오히려 이 오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가 본 것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게 된다. 바로잡으며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금선의 사진은 우리를 모름의 영역으로 안내하는 길이 된다. ‘모르는 사진’이 알려주듯, 모르는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방식일 수 있고, 우리가 모르는 것에서 우리의 앎이 시작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역설적이다. 말하지 않고 말 걸지 않는 사진들은 ‘역설’이라는 엔진을 동력 삼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리감의 발견
사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시 말해 우리의 모름이 시작되자, ‘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을 보며 가장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집과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변화다. 카메라는 오직 집과의 거리감에만 변화를 준다. 가까이에서 찍어 집의 일부만 보이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멀리서 찍어 집의 전모가 보이는 사진도 있다. 그보다 더 멀리서 찍은 사진 속에서 집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과 함께 풍경이 된다.
거리 조정은 한금선이 고민하는 관계성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타자와 맺는 관계는 언제나 타자로 하여금 타자성을 잃게 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동반한다. 내가 누군가 동일시할 때, 그와 나 사이에는 높은 친밀감이 생긴다. 그로써 나와 그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는 일체감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일체감은 그가 가지는 타자성의 상실을 전제한다. 그는 나와 함께함으로써 그 자신의 일부를 소실할 수밖에 없다. 완전한 타자성이 존재할 수 없듯 완전한 일체감도 존재할 수 없다. 공존의 적정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우리는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을 때 타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공존할 수 있을까.
전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찍은 집, 집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찍은 집, 집이 위치한 공간과 환경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집. 거리를 조정함으로써 우리가 집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폭은 넓어진다. 그러나 거리 그 자체에 답이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사진 속 방법론을 통해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화된 방법이 다가서고 멀어지는 일의 반복이며 그것만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소박하지만 진정한 사실이다.
거리는 공간적 개념만은 아니다. 한금선의 사진에서 거리 감각은 시간이라는 개념 안에서 더 극적으로 작동한다. 사진의 시제는 과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을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진들은 과거의 한 장면 안에서 다층적인 시간을 만들어 낸다. 한금선의 사진들 속에서 추동되는 서사적 시제는 현재를 포함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곳에 지은 기둥 없는 집들은 분명히 임시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순간적인 시간, 임시적인 시간을 상징한다. 결코 연속성을 가진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거듭 사진을 보며 나는 이 사진들의 심리적 시간이 ‘미래’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바닥에 놓여진 돌이나 정갈한 집의 모습에서 주어지지 않은 미래를 만들려는 인간 본연의 의지 같은 것이 읽혔기 때문이다. 타이어를 묶어 놓은 형상이라든가, 날아가지 말라고 눌러 놓은 돌이라든가. 뽑힐지라도 뿌리를 내리려는 것은 인간의 중력 지향을 보여 준다. 떠다니지 않으려는 힘은 미래를 향한 힘이다.
세 개의 하늘
시간의 표현은 세 개의 하늘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먹구름이 낀 어둑한 하늘에는 오늘 하룻밤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운명이 숨겨져 있다. 어둠이라고는 없는 푸른 하늘은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의 경이로움을 말하는 듯하고, 설산과 함께한 하늘은 그들 삶에 눈 덮인 기억들을 그윽하게 끌어올린다. 세 개의 하늘과 하늘 아래 집들은 우리 삶의 진로를 과장도 미화도 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신중하게 담아 낸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은 전조로 가득하다. 몰려오는 먹구름을 배경으로 자리한 집이 이토록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을 대적하는 빛의 등장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의 홍보물로 만들어진 미치도록 화려한 텐트 위를 드리우는 먹구름과 햇살의 공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이 빛은 참혹해서 더 경이롭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복선은 현실이지만, 그 복선과 대적하겠다는 듯 나타난 빛도 현실이다. 우리의 절망이 현실이듯, 우리의 희망도 현실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전조나 복선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삶의 현장과도 같다. 세상이 이토록 험난해도 하늘은 이토록 파랗다니, 그것이야말로 인생이라는 말일까. 그러나 그 새파란 하늘이 우리 삶의 진창을 관조하는 차가운 파랑일 것 같지는 않다. 그처럼 지속되는 삶은 살아온 나날을 통해 가능하다. 눈을 품고 있는 하늘은 이야기를 머금고 우리를 내려다본다.
세 개의 하늘은 끝내 침묵으로 말하고자 하는 한금선이 지닌 결기의 표현이다. 하늘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집은 하늘의 영향권에 속한다. 한금선이 찍은 하늘과 빛과 집은 그의 사진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생의 조건, 즉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한다. 다시 보니 이전에 알던 것과 다른 앎이 보인다. 다르게 보니 지난 모든 것들이 다시 보인다.
그들의 기억을 들춰내지 않고도, 그들의 표정을 담아내지 않고도,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줄곧 ‘난민’이라는 말이 보여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얻은 것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 결과지만, 나는 이제야 내가 ‘난민’이라는 언어에서 해방되었고, 드디어 텅 빈 마음이 되는 데 성공했다고 느낀다. 물론 이런 내 마음은 불확실한 공유의 일면일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 그 전모를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불확실한 예감이 작가와 나 사이, 작가와 당신 사이에 공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위대한 침묵의 힘이고, 진실한 예술의 힘일 것이다.
■ 작가 소개
한금선
덕성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프랑스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와 사진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집시 바람새 바람꽃’ 요양원의 삶을 다룬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 그리고 ‘경계에서다 바람에 눕다. 고려인’ 그리고 오키나와 사회적 풍경을 담은 ‘백합이 피었다’ 생명을 품은 마을 작업 ‘산그늘 마을 진뫼’ 사진전과 사진집을 발간했다.
참고)‘갈라선 빛 기대어 선 집’은 국제NGO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진행한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캠프 사진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