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택의 <스톤마켓>에 대하여
스티븐 에반스
예술가, 저자, 큐레이터, 휴스턴 포토페스트 디렉터
“우리 시대 종교와 신앙을 석재마켓에서 본다.” - 조현택
기이한 풍경을 담은 조현택의 <스톤마켓> 연작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사진 속 이미지가 자아내는 신비로움은 작가의 밤샘 장노출 촬영을 통해 짙어진다. 작가는 희미한 조명 아래 석재상을 빼곡히 메운 성물들의 파노라마 이미지를 선보인다. 조현택이 촬영한 석재상에서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온갖 성상과 조각상이 신앙과 전통을 뚜렷이 드러내는 다양한 도상과 함께 공간을 채운다. 촬영된 풍경은 바벨탑 붕괴의 결과를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데, 사진 속 석상들은 감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언어들을 각기 구사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종교적 기질의 힌민족은 샤머니즘,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의 영향아래 살아왔다. 근대에 들어서는 급속한 산업화와 세계화가 천주교와 개신교 신앙의 탄탄한 성장을 뒷받침했다. 이렇듯 상반되는 신앙이 초래하는 격동은 사회에서, 또 사람 사이에서 소외감, 분열,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 조현택은 한국 문화 속에 존재하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종교의 현실을 시각적으로 포착해 전통, 현대, 종교적 유산, 그리고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긴장감 넘치는 병치를 선보인다.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여러 미디어에 의해 계속 극대화되기만 하는 분열이 팽배한 현시대에 조현택의 사진은 이런 갈등의 부조리와 반휴머니즘을 반영하며 소리없이 장관을 이룬다.
건축적 조형물, 한국의 성상, 신비로운 동물, 성모마리아, 용, 부처, 얼룩말, 가교, 천사, 울트라맨, 사자, 그리고 예수을 비롯한 형상들이 마치 성상들의 흥겨운 축제에 참석하는 것처럼 한데 모여 있다. 밤을 밝히는 도시의 은은한 불빛에 둘러싸인 조현택의 파노라마 장면들은 작가가 직접 보고 촬영한 석재상이 위치한 지역의 변화하는 동네 흔적을 사진의 가장자리에 담아낸다. 도시속 역사 지구의 근대화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긴장 상태속에 상반되는 신앙들의 긴장감 또한 묻어난다. 건축, 상업, 개념, 영성 등 모든 부분에서 새로움이 전통을 대체한다.
조현택의 <스톤마켓> 사진에 표현된 시가적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우리는 해당 연작을 작가의 사회적 논평이자 관찰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논평은 사회의 다양한 직업과 계층을 대변하고자 여러 페르소나를 만들어 냈던 작가의 초기작에서부터 나타났다.
작가는 한국 근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사회 환경속에서 거의 은폐된 정령 신앙과 무속 신앙 행위의 증거를 제시한다. 조현택의 <스톤마켓>은 사회적 지형도이자 비판적 지형도이며 종교적 믿음을 그린 지도다.
작가노트
스톤마켓 – 부제: 믿음의 중간지대
1. 스톤마켓(2019)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돌조각 판매상의 야간 풍경을 촬영한 50점의 사진 연작이다. 이 곳들은 주로 부처나 예수와 같은 종교적 조각상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곳이다. 주로 도시 변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산에서 이 작업을 하던 중에 새벽까지 촬영이 이어진 적이 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던 내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 한분이 부처 석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한참 기도하는걸 본적이 있다. 그 순간 나는 촬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성한 대상을 불경하게 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뒤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보았다. 여전히 시끄럽게 지나가는 도로의 차들과 네온사인, 주변의 건물들이 돌조각들과 아무런 맥락도 없이 거기 있었다. 수많은 돌조각들이 풍경 전체를 매우 생경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만들었다. 사실 기복 중심의 숭배와 소망의 정서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것인데도 나는 막상 그 대상과 마주했을 때 생경함과 오싹함을 느낀다. 과거와 현재, 세속과 종교적 이미지의 이질적인 결합에 더해, 나는 그 부조화의 해석하기 어려운 과잉과 마주친다.
2. 사진은 생각보다 중간지대를 잘 드러낸다.
종교적 심볼을 돌로 만들어 우상화하는 방식은 일찍이 시작됐다. 인간은 재현된 조각을 통해 그것을 상징화하고 소유했을 것이다. 암각화를 그리던 인류는 말을 조각하고 사람을 조각했을 것이다. 후에 종교가 생기고 그것은 믿음으로 발전한다. 믿음은 대상을 통해 견고해진다. 그 안에 신화는 잘 짜인 극본처럼 오류 없이 작용한다. 무엇을 믿을 것인지 해답은 이미 나와있다. 선택만이 존재할뿐. 종교 안에서는 서로를 다르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곳에서는 모든 게 가능한 크로스 하이브리드 종교 유토피아로 작용한다.
부실한 토양 아래 가장 좋은 것을 모아 믿음과 상술을 더한 갖가지 종류의 조각들이 널려있다. 매일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풍경처럼 여러 기호와 목적을 가진 손님들을 위해 수많은 종류의 심볼들이 줄을 서있다. 마치 네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여러 개 준비했어하는 듯... 간혹 부처님 옆에 수녀님이 나오는 것처럼 네가 거기서 왜 나와를 말하며 실소를 짓는 상황도 있다. 한국에서 시작된 적 없는 기독교와 불교는 한국식의 종교로 다시금 탈바꿈한다. 어디서든 종교의 현지화는 있었다. 하지만 시작 없이 현재만 작용하는 느낌이다. 출생은 없고 자라남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맥락 없는 건축과 집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유행처럼 떠도는 사람들과 유령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사이에 난장판이 된 시장통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전기차가 출시되고,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가까워졌다고 언론에서 얘기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성과 상식이 오작동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믿음이 사라진 시대, 문명 이전의 대상을 찾으려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 귀소본능 같은 것이다.